반쪽의 역사:
여성과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 운동의 함성은 두 달이 넘도록 전국 각지에 울려 퍼졌다.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던 3.1 운동은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려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 이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국내외 민족 지도자들은 1919년 4월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결성했다.
3.1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은 유관순이다. 16세의 나이에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한 그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기념된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독립 만세를 목놓아 외친 그날, 그곳에는 유관순 외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의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에 여성들이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어 시위를 주도한 사실을 당시 사료와 신문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순한글 1,355자로 쓰인 대한독립여자선언서.“신체가 허약한 여자의 일단이나, 같은 국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 동포여 빨리 분기하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83년 안수산(도산 안창호의 장녀, 미 해군 최초의 여성 장교) 씨의 자택에서 발견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1919년 2월 간도 애국부인회 8인이 발표한 여성 주도의 선언서로, 여성의 애국정신과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면서 독립운동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밝혔다. 이는 식민지 여성이 제국주의에 맞선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1928년 1월 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 여성 운동의 사적 고찰> 기사.
1928년 1월 6일 자 동아일보는 “3.1 운동 전체가 조선 인민 전부에게 많은 정치적 의식을 환기한 것은 물론이지마는 조선 신진 여성으로서 정치적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이때를 최초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3.1 운동을 통해 여성의 활동 영역이 교육, 종교에서 정치로 확대되었다고 평가했다.
만세 운동에 앞장선 이들 중에는 기생들도 있었다. 3월 19일 경남 진주에서는 32명의 기생들이 시위의 선두에 서자 백정의 아낙들이 칼을 들고 몰려나와 만세를 불렀다. 소위 사상(思想) 기생들은 통영, 수원, 해주 등에서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기생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는 독립투사라는 것이 옳을 듯했다. 기생들의 빨간 입술에서는 불꽃이 튀기고, 놀러 오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 지르고 있었다.” 1919년 9월 경성의 치안 일본 경찰 지바 료(千葉了)가 총독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학생, 부녀자, 기생 등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참여한 3.1 운동은 여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성별과 신분을 뛰어넘은 독립운동의 급박한 상황에서 여성은 봉건 제도의 속박을 벗어나 사회적 지위와 참여를 인정받게 되었다. 3.1 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임시 헌장 제3조 역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라고 규정했다. 세계적으로 성 평등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헌법에서 남녀 평등을 강조한 점은 높게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이 그리던 조국만큼 평등하게 기념되지 않는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 통계(2018. 8. 15. 기준)에 따르면 전체 독립유공자 15,052명 중 여성은 325명(2.16%)에 불과하다. 여성 독립유공자는 수가 적을 뿐 아니라 포상 등급도 남성에 비해 낮다. 성별 포상 등급 비율을 살펴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대한민국장·애족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 비율이 높다(1등급 대한민국장의 여성 포상자는 중화민국의 쑹메이링(宋美齡) 1명뿐이지만 전체 여성 독립유공자의 수가 적기 때문에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장제스 중화민국 초대 총통의 아내이기도 한 쑹메이링은 독립운동 자금 지원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국내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최고 2등급에서 시작해 낮은 등급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일본 대사 암살을 계획하고 무장 투쟁을 펼치다 옥사한 남자현(대통령장), 교육 계몽 운동에 앞장선 김마리아(독립장), 여성 의병장 윤희순(애족장)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동안 여성 독립유공자 수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여성의 독립운동을 증명하는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그로 인해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또 여성의 활동을 ‘뒷바라지’ 등 보조적인 역할로 단정 짓는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최근 대중문화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를 주체로 조명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남자현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암살(2015)’의 독립군 저격수 ‘안윤옥’, 영화 ‘박열(2017)’에서 일제의 만행에 저항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성 독립유공자가 지나치게 적다는 비판에 국가보훈처는 지난 6월 ‘제4차 국가 보훈 발전 기본 계획’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 기준 완화 및 포상 확대를 약속했다. 지난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는 가네코 후미코가 옥사 92년 만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기도 했다. 이날 포상자 중 여성은 총 32명으로 25%에 달했지만, 전체 여성 독립유공자의 비율은 여전히 2%를 웃도는 수준이다.
내년 2019년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각각 2개월간, 27년간 독립운동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남성 독립운동가들 외에도 수많은 여성들의 용기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폭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도 하고, 음식·의복·무기 등을 조달하며 독립운동을 지탱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쟁과 살림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이들의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거나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며느리, 딸이라는 호칭에 가려져 왔다.
1919년 2.8 독립 선언을 앞두고 동경여자유학생회의 황에스터가 한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록되지 못하고, 기록의 부재로 합당하게 기념되지 못하며, 연구되지 않아 잊혀 가는 그들을 이제는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겨진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는 영영 묻혀 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정 사료에만 의존한 역사 연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백범일지> 외에 주목해야 할 기록으로 <장강일기>를 제시한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은 2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대부분 사진 한 장, 이름 몇 자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이름 석 자 남아 국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이들이 올해로 354명이다(2018. 11. 3. 기준). 역사서에 쓰인 이름 몇 줄 외에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국내에서 몇 안 되게 여성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다.
역사는 기록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잠들어 있는 사료를 해석해 논의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연구자의 몫이다. 독립운동사 연구의 사각지대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업적을 되살리는 작업이 어떠한 사회적 여건에 놓여 있는지, 여성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일제 강점기 한국 여성의 삶을 어떠한 맥락에서 살펴야 하는지 듣기 위해 한국 근대 여성사 연구자 신영숙 씨를 만났다.
기사에서 짧게 언급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업적과 독사진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