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은 2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대부분 사진 한 장, 이름 몇 자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이름 석 자 남아 국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은 이들이 올해로 354명이다(2018. 11. 3. 기준). 역사서에 쓰인 이름 몇 줄 외에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국내에서 몇 안 되게 여성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다.

지난 11월, 임시 정부의 발자취를 좇아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자싱(嘉興)과 항저우(杭州), 난징(南京)을 다녀왔다. 백범 김구와 임시 정부 요인들의 삶의 터전을 직접 방문하고 그들에 관한 일화를 전해 듣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중 낯선 여인들의 이름과 사진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주가예(朱佳蕊)’와 ‘주애보(朱愛寶)’라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이후 백범 김구의 피신 생활을 도왔던 중국인이라고 한다. 낡은 흑백 사진이었지만,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역사 속에 남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왼쪽이 주가예(朱佳蕊), 오른쪽이 주애보(朱愛寶)

묘한 위화감이다. “임시 정부의 며느리”라고 불리며 같은 공간에서 임시 정부의 살림을 도맡아 했던 정정화 선생의 독사진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임시 정부 요인들의 부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시 정부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과 고난을 함께하고 역사를 만들어나갔지만, 이들은 단체 사진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인물 중 단지 작은 형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일제 시기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은 남성만이 아니었다. 안중근의 어머니로 알려진 조마리아 선생처럼 독립운동가를 뒤에서 뒷바라지한 어머니나 아내도 있었고, 더러는 남자현 의사처럼 직접 항일 투쟁 대열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 있는 900여 개의 독립운동 관련 현충 시설 중 여성 독립운동가를 주체에 두고 그들을 기리는 시설은 20여 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유관순 열사 관련 시설만 7개이다. 있는 시설 또한 관리 실태는 매우 미흡한 상황이다. 예컨대,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라고 알려진 윤희순 의사의 기념 동상은 춘천시립청소년도서관 뒤편 주차장에 건립되어 있다. 이곳에 독립운동가의 기념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매우 드물다.

한편,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환기하는 곳이 있다. 국내 유일의 국립여성사전시관이 그렇다.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여성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곳에서 기계형 관장을 만났다.

History에서 Herstory로
되살아난 여성 독립운동가의 숨결

국립여성사전시관 기계형 관장. ⓒ여성신문

“역사(History)는 지금까지 남성의 관점에서 기술되어 왔어요. 그 속에서 여성의 삶과 목소리는 번번이 소외되어 왔죠. 그런 점에서 역사의 수면 아래 잠겨 있었던 여성의 삶을 ‘눈에 보이도록’ 재현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국립여성사전시관은 ‘허스토리(Herstory)’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2년 12월 9일, 여성가족부 산하기관으로서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2층에 문을 열었던 국립여성사전시관은 올해로 16주년을 맞이했다. 2014년부터는 고양시로 이전하여 현재는 정부고양지방합동청사 건물 1, 2층을 사용하고 있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여성사를 뒷받침하는 유물들을 두루 수집하고 이를 전시하지만, 이 중에서도 이들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이다.

'독립을 향한 여성 영웅들의 행진' 포스터. ⓒ국립여성사전시관 홈페이지

“우리나라 박물관들 중에 국내외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유물과 전시를 통해 재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기계형 관장은 2015년에 열린 광복 70년 특별기획전 <독립을 향한 여성 영웅들의 행진>을 이렇게 떠올렸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등 기라성 같은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유물과 문헌 사료는 독립기념관에 잘 전시되어 있어요.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죠. 국립여성사전시관은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6일,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제윤경 의원이 독립기념관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850개의 전시물 중 여성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전시물은 12개로, 전체 전시물의 1.4%에 해당한다. 또 1987년 개관 후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7개, 49회에 불과했고, 특별 기획 전시는 2002년 진행한 ‘여성 독립운동과 유관순 열사’ 전시 1건뿐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독립기념관에 자리하지 못한 김마리아, 박차정, 안경신, 오광심, 이신애, 조화벽 지사 등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기념되었다. 특별 기획전 <그날의 기억>, <독립을 향한 여성 영웅들의 행진>, <가죽가방의 주인, 여성 독립운동가 조화벽 지사> 등이 그것이다. “영화 ‘암살’의 개봉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에요. 국립여성사전시관은 더 많은 시민들이 박물관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계획입니다.”

표류 중인 여성사박물관
이들이 자리할 곳은 어디에

국립여성사전시관은 지난 5월 여성유물을 보관한 수장고, 전문 학예사, 교육 공간 등 여러 조건을 갖춘 1종 국립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국립박물관’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여전히 독립 건물과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장소 문제를 해결하고 국립여성사전시관을 종합 박물관으로 전환하기 위해, 2012년부터 여성사박물관 건립 운동이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법적인 토대가 모두 마련된 이후에도 박물관 부지 선정의 문제는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2016년 4월, 국토교통부가 미군이 떠난 용산 기지에 여성사박물관 건립 부지를 확정했지만 서울시의 반대에 부딪혀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립여성사전시관은 다른 부처 산하의 국립박물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산과 조직이 미흡합니다. 이런 전시관의 처지는 전체 독립유공자 중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가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금의 대한민국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국립여성사전시관의 기계형 관장은 몇 년째 표류 중인 부지 확보 문제를 곱씹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국립여성사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역사적 기억의 터를 마련하는 것과 같아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울인 여성들의 노력과 역할을 기억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 터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국내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서 기념되는 곳, 국립여성사전시관. 성 평등을 부르짖는 사회에서조차 평등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지만, 국립여성사전시관을 지키는 이들은 오늘도 묵묵히 여성 독립운동가의 낡은 기억을 닦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