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으로 남겨진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는 영영 묻혀 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정 사료에만 의존한 역사 연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백범일지> 외에 주목해야 할 기록으로 <장강일기>를 제시한다.

<장강일기>는 임시 정부 망명 생활을 묵묵히 뒷바라지해 ‘임시 정부의 며느리’라는 별명을 가진 정정화(1900~1991) 선생의 40여 년 활동이 담긴 회고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건국의 어머니”라 지칭한 수당 정정화 의사가 바로 이분이다. 여성 저자가 임시 정부와 독립운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장강일기>는 <백범일지>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연구는 미미하고 <장강일기>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없는 현실이다. 성적으로 불평등한 역사 기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임시정부 맏며느리 ‘정정화’
뒷바라지라는 명목하에 가려진 그녀의 공적, 독립운동이라는 인식 부족

정정화 선생과 아들 김자동

정정화 선생은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협회 회장을 지낸 동농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결혼했다. 대한협회는 교육 진흥과 식산흥업을 목표로 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대한자강회의 강제 해산 후 이를 이어받아 창립된 항일 정치 단체이다. 21세에 이미 중국 상해에 망명해 있던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상해로 탈출하면서 중국에서의 망명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독립운동 자금 모금의 밀령을 띠고 지하 조직을 통해 국내에 잠입,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은밀히 임정 밀사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어머님은 사실 상해를, 미리 가 있는 우리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며느리의 도리를 하기 위해 찾아간 거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간 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 당시에는 그랬어요. 그런 거까지는 생각을 못 했지.”

수당 정정화 선생의 외아들 김자동(91,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씨는 어머니의 임정 활동을 당시 유교적 관습하에서 이해한다고 말한다.

“임시 정부의 삶은 시기에 따라 변동이 많았어요. 처음엔 청년들도 많이 몰려들고 금방 독립이 될 것 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전승국으로서 일본의 지위는 나날이 강해지고, 금방 모든 게 어려워졌지요.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 아주 극소수라고 볼 수 있어요.”

정정화 선생은 자금 조달이라는 사명을 띠고 직접 국내에 잠입해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어려웠던 임시 정부에 활로를 만들었다. 임시 정부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다는 인식과 이러한 후방 지원은 보조적 활동에 불과하다는 목소리에 그녀의 공적이 가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생의 기록 <장강일기>가 가지는 중요성은 분명하다. 그리고 저자와 기록물의 기념은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임시 정부의 정신적 지주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기념되는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의 사례에 비추어 보아도, <장강일기>의 조명을 위해서는 저자인 정정화 선생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독립운동가로서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장강일기>와 <백범일지>
여성의 시각에서 그린 중요한 역사적 사료, <백범일지>와는 또 다른 의미 지녀

<장강일기>는 수당 정정화 선생의 구술에 기초해 기록된 회고록이다. 약 25년 동안의 중국에서의 망명 정부 뒷바라지 생활과 해방 이후, 6.25 이후의 인생이 총 18편의 글로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1987년 <녹두꽃>이라는 제목으로 초판이 나왔으며, 1998년 <장강일기>로 제목을 바꾼 개정판이 학민사에서 출간되었다.

장강일기(1998). 정정화 지음. 학민사.

송건호 전 한겨레 신문 사장은 <장강일기> 추천사에서 “밖에서 본 임정이 아닌, 안에서 본 관련 인사들의 면모가 잘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사학을 전공하는 학자, 특히 중국의 임정과 8.15 이후의 한국 정치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며 <장강일기>가 가지는 기록으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강일기>는 대중들이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임시 정부의 온갖 사정을 숨김없이 밝히고 있다. 기존 사료들과 달리 일련의 사건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또한 누구보다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정정화 선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신뢰성이 높다. <백범일지>와 같은 기존 사료에는 한두 문장으로만 기술되었던 역사나 인물들이 좀 더 풍부하게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행해지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교차 검증’이 있다. 서로 다른 시각에서 쓰인 자료들을 토대로 모순되는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장강일기>와 <백범일지>는 임시 정부의 일원이었던 남녀 저자의 서로 다른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교차 검증의 유용성이 크다.

1919년 창설 이후 임정은 숱한 위기를 겪었으며 재정적 어려움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행정적 측면에서 자세히 기술된 <백범일지>와 달리 <장강일기>에서는 직접 살림살이를 담당했던 여성으로서 느낀 힘겨움이 잘 드러난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본국 동포들의 비밀 연납과 미주, 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세금 명목 상납으로 충당했는데, 왜의 강압과 운동의 퇴조로 원년(1919년)보다 2년(1920)의 숫자가 감소되고, 그 후 점점 더 감소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직무도 정지되고 총장, 차장들 중에서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경이니 그 아랫사람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며, 그 중요 원인은 경제적 곤란이었다.”

고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본인의 처지를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정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낸,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정화 선생은 <장강일기>에서 임시 정부의 곤궁한 생활을 아녀자의 시선으로 다시 기록하고 있다.

“하루하루 힘들게 연명하다시피 하는 상해 생활로 봐서 내가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대의를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여러 지사들도 활동을 위해서는 생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했다. 부엌에 드나드는 아낙네의 처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고 명색이나마 밥상에 올릴 식량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정한 직업이 없고, 땅뙈기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해에서는 겉으로 떠벌리며 푸념하지 않았을 뿐이지 속으로는 애간장을 녹이는 실정이었다.”

부족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료로도 쓰임새가 있다. 독립운동가 오광선 장군의 아내 정현숙 지사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35년까지 만주 지린(吉林) 일대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 업무를 맡았으며 1941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결성해 활약하기도 했다. 그녀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자녀 양육도 도맡아 했다. 기록의 부재로 줄곧 인정받지 못했던 지사의 공헌이 <장강일기>를 통해 드러났으며, 그녀가 남편과 떨어져 갖은 고초를 당한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백범일지>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거나 다루어지지 않았던 사실이 <장강일기>의 기록을 통해 재조명될 기회를 얻은 사례이다.

정 씨는 홀로 삼 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중략) 영걸 어머니는 고생이 심했다. (중략) 영걸 어머니는 만주에서 농사 경험도 있고 몸도 건강해서 내 밭일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여성 저자의 섬세한 시각으로 기존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하기도 한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동경 사건 이후 우리 동포들의 나에 대한 동정은 비할 데 없이 깊었다. 본국 풍속이면 내외할 처지이지만, 오랜 해외 생활에 형제, 친척과 같아서 남자들보다 부인들이 더욱 나를 애호하였다. 어느 집에 가든지,
“선생님, 아이 좀 안아 주시오. 내 맛있는 음식 해 드리리다.” 하였다.”

며 임시정부 요인 가족과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장강일기>에서 구체적으로 그와 정정화 선생 부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집은 아이를 키우면서 단 세 식구가 살게 되었고, 백범이 우리집에 와 아이를 돌봐 주곤 했다. 백범은 워낙 체격이 좋고 우람하여 식사의 양이 좀 많은 편이었다. 어쩌다 자금이라도 좀 생기면 임정의 살림 비용뿐만 아니라 애국단의 폭탄이나 무기 장만 등의 비용에 우선적으로 쓰였으므로 개인적으로는 먹고 사는 게 늘 어려웠다. 서너 시쯤 백범이 우리집으로 온다.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
왜놈 잡는 일에는 그렇게 무섭고 철저한 분이지만, 동고동락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다정하고 자상하며 격의 없는 분이 백범이었다.”

임시 정부가 세워진 지 100주년. 여전히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 및 연구는 부족하고, 남성과 현저히 차이 나는 포상 등급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역할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정화 선생의 <장강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독립과 임시 정부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삶은, 그를 독립운동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