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
:아나키즘 독립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를 듣다


작년 하반기, 영화 <박열>의 흥행 이후 ‘아나키스트’라는 단어가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권력을 거부하고 오직 자유만을 추구한다는 박열과 동지들의 사상, 아나키즘이 많은 관객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더불어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 사상이지만, 오늘날 그 역사적 함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나키즘이란 정확히 무엇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에 어떠한 흔적을 남겼는가? 오늘날 다시 제기되고 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국민문화연구소’를 찾았다.

국민문화연구소는 아나키즘을 실천적으로 다루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단체이다. 우관 이정규의 뜻으로 1947년에 설립된 이 단체는 사회운동, 농촌운동, 교육 분야 등의 활동을 통해 한국 아나키즘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그 동안의 무관심을 방증하듯, 오늘날 연구소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국민문화연구소의 엄동일 회장, 김창덕 총무, 그리고 대한민국 아나키즘의 산 증인 이문창 선생은 아직 아나키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국민문화연구소의 사무실

아나키즘은 이론이 아닌 상식이다

“아나키즘은 상식이지 이론이 아니거든.” 올해로 91세인 이문창 선생은 아나키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 명의 아나키스트로 살아온 그의 연륜이 담긴 요약이다.

그렇다면 이 ‘상식’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선생은 1928년 발행된 아나키스트 기관지 ‘탈환’에 실린 우관 이정규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내 생명을 뺏겼는데 이걸 되찾으려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생물의 본능이거든.” 아나키즘은 ‘살 수 있는 자유’를 중시하는 사상이다. 살 수 있는 자유를 뺏겼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찾으려 하는 것은 모든 생물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일제에게 생명의 자유를 강탈당한 이들의 당연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고민이 살 수 있는 자유를 되찾는 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유를) 되찾은 후에도 이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대안”이라고 이문창 선생은 덧붙인다. 아나키스트들은 해방 후의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상호부조론’에서 찾았다. 상호부조론은 개개인이 생존경쟁을 넘어 자발적으로 협력 관계를 구축할 때 비로소 사회가 발전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대한민국이 주체적인 민중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연대로 이뤄지는 상호부조의 공동체로 거듭나길 바란 것이다.


아나키즘의 흔적, 의열단과 교통국

독립운동을 생존투쟁으로 본 아나키스트들은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운동을 주장하면서도 민중의 주체적인 참여와 연대를 강조했다. 이러한 방법론은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 이른바 ‘의열단 선언’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선언문에서 안중근과 같은 폭력 투쟁의 바탕에는 민중의 지지가 있어야 하고, 3•1운동과 같은 민중 운동에는 폭력적 투쟁의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의열단의 강경한 무장투쟁과 아나키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아나키스트들은 중국에 위치한 임시정부와 국내의 민중을 연결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예시는 교통국 활동이다. 중국 단둥(丹東)에 설치됐던 교통국은 국내의 정보를 임시정부로 전달하고, 임시정부의 소식지•신문 등을 국내로 밀반입하는 역할을 했다. 이문창 선생은 여객전무 행세를 하며 국내와 단둥 간에 자료를 운반한 아나키스트 유자명을 언급했다. 국내 진입은 이처럼 민중으로부터의 혁명을 주장한 아나키스트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국민문화연구소의 김창덕 총무(왼쪽)와 이문창 선생(오른쪽)

공화국에서 온 아나키스트

“국내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했어. (…) 우리의 발언권이 큰소리가 될 수 있었는데, 그걸 못하고 만 거야.” 이문창 선생은 한국광복군과 OSS(미국 전략 사무국)의 국내 진입 작전 직전에 해방이 된 한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평한다. 해방 이후 신탁 통치 문제가 불거지고 사회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한반도에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려는 시도는 불발되었다.

자연히 동력을 잃은 국내의 아나키즘 진영은 그때부터 교육 개혁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대학생들에게 자유로운 교육을 제공하여 억압적인 사회 현실에 저항할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4.19 혁명과 이어지는 4.25 교수단 데모로 맺어진다. 이 때 교수단 데모를 주도한 것은 국민문화연구소를 설립한 아나키스트 이정규(당시 성균관대 총장)였다.

하지만 군부독재 시기 ‘반국가적이다’, ‘무질서를 조장한다’라는 낙인이 찍힌 아나키즘은 사람들에게서 외면 받기 시작한다. 관련 서적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재조명을 받고 있는 아나키즘에 대해 김창덕 총무는 희망적인 시선을 던진다. 그는 “많은 사람이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막연하다”라며, 올해부터는 단체를 알리는 활동뿐 아니라, 아나키즘 자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강좌도 실시할 예정이라 밝혔다. 이문창 선생 역시 생활공동체에 기반한 아나키즘의 확산을 주장하면서도 “자발성이 아나키즘의 시작”임을 다시 강조했다.

글: 박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