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그 후 남아있는 문제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하지만 전쟁의 끝이 군함도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겪은 피해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군함도 피해자 및 가족들은 임금 미지급 문제, 노동 재해 보상 문제, 유골 문제, 피폭 문제 등으로 고통 받았다.

[임금 미지급 문제]

일본 정부는 패전 직후 군함도 피해자들을 비롯한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미불 임금을 공탁 조치했다. 공탁이란 채무자가 변제를 하려고 해도 채권자가 변제받지 않거나 변제받을 수 없는 경우 또는 과실 없이 채권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 채무자가 채무의 목적물을 공탁소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공탁 기한이 만료되면 공탁금은 국고로 환급된다. 일본 정부는 공탁소에 미불 임금을 맡긴 후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게 임금을 돌려 주지 않을 속셈이었다. 실제로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92%는 미불 임금 중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나머지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도 극히 일부만을 돌려 받았다.

이러한 공탁 조치는 명백한 위법이었다.

군함도 피해자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하시마 탄광과 다카시마 탄광을 소유하고 있던 미쓰비시 광업의 경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임금과 예치금을 정부에 공탁하지 않고 직접 관리했다. 이는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미불 임금을 지금까지도 미쓰비시 광업 측이 보관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카시마 탄광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내역
종별 금액(円) 비고
임금 잔액 17,452.57 광업소 보관
퇴직위로금 47,128.50 광업소 보관
채권(액면) 15,070.00 광업소 보관
가족수당 62,295.00 광업소 보관
기본보급 23,736.03 통제회 부담
별거수당 18,000.00 통제회 부담
기간연장수당 5,400.00 통제회 부담
가족위문금 21,600.00 통제회 부담
통제회지급 특별수단 13,530.00 통제회 부담
일반원호금 550.00 통제회 부담
미불금 - -
기간재연장수당 - -
합계 224,762.10 광업소 보관(63.1%) + 통제회 부담(36.9%)

공탁의 자세한 규모는 2010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범위를 강제 동원 피해자로 한정했을 때 공탁 금액은 약 3천 5백만 엔에 달한다. 한국의 피해자 단체는 조선인 군인 및 피징용 선원 등의 공탁금까지 모두 합쳤을 때 총 금액이 약 2억 3천만 엔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엔당 2000원을 적용하여 미수금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계산 방식을 적용했을 때, 2억 3천만 엔은 4600억 원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한국의 피해자 단체는 실제 미불임금의 총 규모가 이보다도 훨씬 큰 4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상당수의 일제 전범 기업들이 공탁 규모를 은폐 혹은 축소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도표는 공탁 규모를 은폐한 대표적인 기업인 나가사키 항운의 ‘미불금 및 공탁금 현황’이다.

<나가사키항운의 미불금 및 공탁금 현황>



[유골 문제]

<다카시마 공양탑>

당시 하시마 섬 내에는 화장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시마 탄광에서 죽은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시신은 나카지마의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그리고 화장된 유골들은 하시마의 사찰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1974년 하시마 탄광이 폐광되자, 유골은 전부 다카시마의 납골 시설에 옮겨 안치되었다. 하지만 1988년 다카시마 탄광 또한 폐광되면서, 납골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이 때 유골 중 일부만이 인근 사찰로 옮겨 안치되었으며, 나머지 유골은 ‘공양탑’ 이라는 볼품없는 석비 밑에 한번에 매립되었다. 사찰로 옮겨 안치된 뼈도 최소한의 성명 분류도 없이 뒤섞여, 지금은 유골 주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태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공양탑을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많아지자 2016년 말 이 공양탑마저 완전히 폐쇄해버렸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큰 나무로 막고 양옆에 철판으로 된 엉터리 안내판을 만든 것이다.

[피폭 문제]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는 군함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군함도의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포함한 나가사키 지방의 강제 동원 피해자들은 나가사키의 원폭 처리 현장에 제대로 된 방호복도 지급 받지 못한 채 투입되었다.
일본정부는 1957년 ‘원폭의료법’을 제정해 일본에 사는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무료 치료를 시작했으나, 한국인 피폭 피해자들은 이 법에 의한 치료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오랜 싸움 끝에 1978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도 ‘원폭의료법’에 의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을 떠나면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게끔 여기에서도 꼼수를 부렸다. 이후 1990년 일본 정부는 한국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의료지원금 40억원을 내겠다는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피해자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면 배상으로 받아들여질까봐 생각해낸 꼼수였다. 때문에 40억 엔은 원폭 피해자의 의료비, 건강진단비와 복지회관 건립비로만 쓰였다. 피폭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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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보상

[한일기본협약]

<한일기본협약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협정을 맺기 위한 일련의 회담을 진행하였다. 14년 동안 총 7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일회담 결과, 1965년 6월 22일 한국과 일본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때 체결된 조약 중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은 이후의 조선인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에서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을 야기하게 된다.


다음은 청구권 협정 제2조 1항의 전문이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 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한국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을 통해서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 국민들의 재산과 그에 대한 청구권’에 대해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정부간의 합의를 마친 한국 정부는 이후 강제 동원에 대해 제한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인 대응을 하는 것에 제한이 생긴 한국 정부는 때문에 최근까지 강제 동원 피해자 및 유가족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적인 역할마저 한국 정부는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미흡한 부분은 강제 동원 피해자 및 유가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한국 정부가 처음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1975년이었다. 이는 1974년 제정된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것이었으며 범위는 강제 동원 피해자 중 사망자의 보상금은 1인당 30만원으로 제한되었다. 30만원이라는 금액은 당시 유자녀 연금법에 따랐을 때 1인당 628만원의 보상금을 수령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더군다나 보상절차마저 까다로워서 수십 만명의 징용 피해자 및 유가족 중 1만명도 안 되는 유족들 만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우선, 2004년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강제동원위원회)가 설치되었다. 2005년에는 정부가 한일회담 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하였다. 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한일회담문서 공개청구’를 거부한 외교통상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1심에서 공개를 명령하는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한일회담 문서 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통하여 정부 대책을 내놓았고 이를 법제화한 것이 2007년에 제정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한국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는 점은 한국 정부가 제정한 법안들이 강제 동원 문제에 관한 본질적인 부분들을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최근 들어서 한국 정부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다시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법안에는 생존해 있는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복지 지원을 할 수 있는 관련 조항, 유해 발굴 사업 관련 조항, 위령 사업 관련 조항 등 이전에는 다뤄지지 않았던 더욱 포괄적인 보상에 관한 조항들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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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직접소송투쟁

그러나 한국 정부의 보상과 지원이 지금까지도 대부분 표면적으로 이루어졌고,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강제 동원 피해자 및 유가족들은 끊임없이 개인적 차원의 대응을 통해 보상과 사죄를 요구해왔다. 이러한 대응은 진상규명 운동, 보상 관련 법 제정 운동, 국제 단체에 제소,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투쟁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강제 동원 피해자 및 유가족들은 주로 피해자 유족 단체나 시민 단체의 도움에 힘입어 집단적으로 행동해왔다.

[소송 투쟁]

많은 민간 차원의 대응 중 보상과 사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응은 소송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와 일본 제철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은 현재까지 17년이란 긴 세월동안 첨예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한 소송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민주화 이후에 해외를 오가는 것이 자유로워지자, 피해자들은 일본에 가서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총 9건의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3건의 소송(신일본제철, 일본강관, 후지코시)에서만 실질적인 보상과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고 나머지 소송들에서는 모두 패소했다. 이마저도 일본 법정에서 강제 동원 문제의 해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판보고회 후 선전활동. 왼쪽에서 두 번째 원고 여운택 씨, 세 번째 원고 신천수 씨. 신일본제철 오사카 지사 앞에서.(1998.6.30)>

이 시기에 일본 사법부가 판결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국가무답책론(1947년 일본의 국가배상법 시행 이전의 대일본제국헌법 아래에서는 국가나 공공단체의 책임을 정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전시 중에 국가권력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개인의 손해에 대해 국가는 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주장), 공소 시효 등 이였다. 주목할 점은 현재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이 주장하는 한일협정으로 인한 개인청구권 소멸은 1990년대 말부터 등장한 논리라는 점이다. 심지어 1991년 야나이 외무성 조약국장은 참의원 예산위원회 심의에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양국이 서로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이며 개인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에서 소멸시켰다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90년대까지 주장했던 논리들이 미국에서 제정된 톰 헤이든 법에 의해 위협받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할 지도 모르는 처지가 되자 개인청구권에 대한 입장을 변경해 개인청구권의 소멸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2000년대부터는 전범기업에 대한 소송을 한국 법정에서 진행하기 시작했다. 2000년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피해자 6명이 지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일본이 아닌 피해국 한국에서 제기한 첫 번째 소송이었고, 이 소송을 기점으로 현재까지도 각 지방법원에 피해자들의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그들을 구제해줄 수 있는 한국 법원의 공정한 판결을 기대했지만 법원과 한국 정부는 오히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다. 정부는 외교상의 문제라며 도움을 회피했고 법원은 연이어 원고에게 패소를 선고했다. 정부가 피해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해 2004년에 발의된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2005년에 한일회담 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하는 등 긍정적인 움직임을 보였음에도, 소송의 승리는 항상 일본 기업의 몫이었다. 법원이 패소를 선고한 이유는 현재 일본의 신일본제철이 원고들을 강제 동원했던 예전의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다르고 채무도 승계하지 않은 회사라고 판단한 점, 일본에서 이미 패소했던 피해자의 경우 일본 재판소의 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 법원의 판결은 90년대 일본 법정에서의 판결보다도 퇴보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파기환송심 판결 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기자회견>

그러나 2012년 대법원에서 1심과 2심 모두 원고 패소한 판결을 파기 환송한 혁신적인 판결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일본 법정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 밝히며 하급 법원의 입장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는 한국 법원에서 처음으로 강제 동원 피해자의 주장을 전적으로 인정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후의 파기환송심 판결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이루어졌다. 2013년에 서울고등법원에서 신일본제철의 책임을 인정하여 원고에게 인당 1억원 상당의 배상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신일본제철은 이에 불복하여 재상고하여 현재 다시 한 번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대법원의 파기 환송, 그리고 그 후...]

"수십년 동안 하시마 강제 징용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 다만 이 나라가, 젊은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다는 걸, 하시마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어. 나라는 그동안 뭘했는지. 이미 너무 늦었어. 다 죽고 아무도 없잖아. 한 10년 전에만 이야기가 나왔어도 서로 얼굴도 보고 그럴텐데…." - 군함도 강제징용 피해자 '이인우(92)'
"일본 정부와 기업이 잘못했다고 고백했으면 하는, 보상금보다 더 큰 바람이 있다" - 강제동원 피해자 '여운택(83)'

대법원 판결 이후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피해자와 유족들은 연달아 제소했으며, 지방 법원에서는 이들의 승소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의 재상고와 소송 지연책으로 최종적으로 언제 마지막 판결이 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대법원에는 2012년 5월24일 대법원에서 피해자들 승소 취지의 파기환송 결과에 대한 재상고 사건 2건과 고등법원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한 판결에 대해 일본 기업이 상고한 사건 1건 등 3건이 몇 년째 계류되어 있다. 대법원은 상고된지 4년이 넘었지만 ‘관련 사건을 통일적으로 검토 중’이라는 이유로 판결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시작한 지 1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소송을 처음 시작했던 생존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그 긴 시간동안 사망하여 유족들이 소송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아래의 표는 이번 파트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요약한 타임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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