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함도>가 개봉되고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분노가 일었다. 군함도 안에서 벌어진 일본의 만행에 대해, 섬 속의 조선인 간 갈등을 영화 속에 담은 감독에 대해 많은 이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섬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다.
일본은 어떻게 군함도를 문 화유산으로 등재했는지,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팩트체크 해 본다.

군함도는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이 됐나




일본 정부의 ‘군함도’ 관광 유산화

  일본 정부는 1974년 폐광 된 뒤 유령도시로 남아있던 군함도를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군함도에 일본 최초의 고층 콘크리 트 건물이 있고, 군함도를 메이지 시대상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몇 년간의 유지보수 기간을 거친 뒤 군 함도는 붕괴 위험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2009년 일반 관광객들에게 개방된다.


2013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 신청

  2013년 9월 30일, 일본 정부는 군함도를 비롯한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 현의 근대화 산업유산 28곳을 유지 보수하고 이들 지역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신청한다. 후보 유적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한국인 수천 명이 강제노역을 했던 조선소, 해저탄광 등이다.


2015년 5월 ICOMOS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 권고

  2015년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산하 민간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메이지(明治) 일본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도록 유네스코에 권고한다. ICOMOS는 23개의 유적 등재에 대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자문 기구의 결정 이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국 정부는 허둥지둥 대응책을 준비한다. 무조건 등재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일부 몰지각한 언론인과 국민들의 반응에 무작정 등재를 반대하기 위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2015년 7월 5일 세계문화유산 최종 등재 확정

  8년 동안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던 일본에 비해 너무 늦은 대응을 한 결과 일본이 신청했던 23곳(나가사키(長崎) 조선소, 하시마(端島·일 명 '군함도') 탄광 등 조선인 수만 명이 강제노동한 현장 7곳 모두 포함)이 최종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확정되었다. 등재 추진 과정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어떻게 반영할지를 놓고 한일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의사에 반해 끌려가 노동을 강요당했다(forced to work)'는 표현으로 타협점을 찾게 되었다. 하 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오롯이 인정한 것이 아니기에 한국 정부는 많은 비판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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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와 우익의 세 가지 여론전

“강제노동이 아니다.”

  2015년 유네스코 총회 석상, 일본대사는 “한국인 강제노동(forced to work)은 국제법에서 규정한 강제노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1910년 일본에 의한 조선 ‘강제병합’이 합법이며, 따라서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과 1944년의 징용령에 의한 동원 역시 합법이므로 강제노동의 예외규정(전시하의 동원)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군함도 내 차별은 없었다.”

  일본은 “군함도에서 한국인들은 차별 받지 않고 일본인과 사이좋게 지냈다 .”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당시 거주자들의 회고나 미담을 적극 발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 우리나라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한 논문이 상당부분 근거로 쓰였는데, “강제동원된 한국인 한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민족별 임금차별이 없었고, 노동의 숙련도에 따른 차이였다.”라 는 내용이 주다. 일본은 이를 영문으로 번역해 홍보전에 나설 거라는 전망이 많다.


“한국은 왜곡과 날조만 한다.”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행태를 왜곡과 날조로 퍼뜨리고 있다. “ 한국은 사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엉터리 자료를 만들어 역사를 왜곡·날조함으로써 일본을 때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경덕 교수가 뉴욕에 걸어 논란이 됐던 그 영상 역시 이 주장의 근거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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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그렇다면 유네스코 문화유산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의 대응 은 어땠는가.
”한국은 왜곡과 날조만 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어떤 대응으로부터 이끌어낸 것인가.
세 가지의 팩트체크 포인트가 있다.




point1:유네스코의 권고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 유네스코 등재 취소 사례

  독일의 엘베 강변의 츠빙어 궁전(Zwinger)과 젬퍼 오페라 극장(Semperoper) 등 주변 명소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었지만 유네스코의 훼손 금지 권고를 무시하고 800미터 길이의 발트슐뢰스헨 다리(Waldschlösschenbrücke)를 개발했다는 이유로 2009년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서 삭제 되었다.


✓ 군함도는?

  유네스코의 재정적 위기는 많은 분담금을 내는 국가에게 많은 힘을 부여하 고 있다. 특히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던 미국이 탈퇴했기에 재정적 위기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권 고사항을 지키지 않았다고 일본의 문화유산을 삭제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 유네스코 권고사항 이행 진행상황

  유네스코의 자문기관은 시설의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라고 일본에 권고한 바 있다. 이는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 사실 등을 명확하게 명기하라는 취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키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교묘히 사실을 왜곡하거나 모호한 말을 사용하여 전체 역사를 명확히 기록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군함도 주변 곳곳의 관광 리플렛 에는 강제징용사실이 명시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강제징용사실을 안내하는 관광가이드는 아무도 없다.

  2017년 12월 4일 일본 내각 관방은 영문으로 기재된 850쪽 분량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센터에 대한 보전 상황 보고서‘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다. 이는 2년 전 일본이 세계 유산을 유치하면서 강제노역의 실상이 담 긴 정보 센터나 안내판을 설치하기 로 한 약속을 이행하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정보 센터의 위치와 그 속내에 있다. 정보 센터는 군함도 및 강제 노역 지역에서 약 1,200km 떨어진 도쿄를 그 입지로 예정하고 있으며, 강제 노역의 실상 을 담아내기 위한 정보센터라기 보다는 자국의 메이지 시대 홍보 센터로 이를 사용하려는 속내를 보이고 있다. 또한 강제 노역에 대한 분명한 적시도 ’노동자들의 이야기‘라는 꼭지 속에 작게 표출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어조가 전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징용이었다고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보 았을 때, 현재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의 이행 사항의 본질을 회피하고, 명목적인 이행만을 고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point2:'메이지 산업유산'과 군함도?

  일본은 군함도를 비롯한 23곳을 ‘메이지 산업유산’이라는 주제로 유네스코에 등재 했다. 근대 산업시설 23곳이 비서구 국가에서 최초로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군함도 역시 메이지 산업화 기간의 유산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군함 도 내에 메이지 시기 건물은 단 하나다. 약 3m 규모의 제방 5번이다. 제방 하나로 섬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메이지 산업화 유산’이라고 등재된 것이 다.

  문화유산 신청대상들의 시기를 메이지 산업화시기로 한정한 이유도 있다. 식민지배 기간을 의도적으로 제외해 반발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메이지 산업화 시기’와 ‘메이지 시대’의 범위 역시 다르다. 일본은 군함도를 비롯한 23곳을 ‘메이지 산업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하면서 그 배경이 되는 메이지 산업화 기간을 1850년부터 1910년으로 잡는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는 일반적으로 메이지 천황이 죽은 1912년까지다. 1910년부터는 일제 강점이 시작된 시기이기 때문에, 식민지배 기간을 의도적으로 제한했다 는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측 사진 속 제5번 제방만이 메이지 유신 때 건설되었다.

  제5번 제방은 약 3m정도다



point3:우리나라 대응의 문제점은 없는가?

✓ 노예시장, 만델라 감옥, 아우슈비츠도 세계유산인데?

  일본정부가 군함도 내 강제노동의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도록 집중하는 데 에 힘을 쏟았다면 어땠을까. 소설 <군함도>를 집필한 한수산 작가는 2017년 8월 2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함도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 이후 한국의 대응은) 한마디로 졸렬했다. 뒤늦게 호들갑을 떨다가 ‘한국이 발목을 잡는다’는 인상만 주고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강제징용이 이뤄진 곳이라 세계유산으로 등재 해선 안 된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된다. 노예시장, 만델라 감옥,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반인륜 범죄가 행해진 곳도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우리의 목표도 처음부터 세계유산 반대가 아니라 강제노동의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라는 점에 집중했어야 한다.


✓ 민간 단체에게만 맡긴 채 뒷짐 진 정부?

  지난 9년간 한국 정부는 정부 대 정부로 일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진상규명들은 모두 민간 단체 중심으로 이뤄졌 다. 피해자와 한일 시민단체가 얻어낸 결과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홈페이지 기고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피해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직접 일본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유골조사와 봉환 문제를 협의해 해결의 물꼬를 텄지만,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초은행에 1945년 이전 일본 내에서 일했던 한국인 우편저금 통장들이 있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국제법에 따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가 지배국가로부터 관련 문서를 인계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 한다. 식민주의 극복을 위해 지속적인 진상규명과 자료 공개, 기념․기억 사업과 교육 등 새 정부가 해야 할 긴 목록 가운데 하나다.


✓ 서경덕 교수의 실수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서경덕 교수가 홍보한 영상, ‘군함도의 진실’ 속에 담긴 잘못된 정보들은 오히려 한국이 ‘왜곡과 날조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얻었다는 평가가 많다. 영상 속 내용들을 팩트체크 해보자.


출처 : 민족문제 연 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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