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 1940년대 군함도에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어떻게 끌려왔는지,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 끝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기사는 직접 창작된 소설의 진행 장면과 함께, 각 장면들에 대한 진위여부를 파악하며 진행됩니다. 이 기사를 통해 격변하는 한국근대사 속 군함도의 조선인이 겪은 참혹한 현실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소설은 군함도에서 실제 벌어진 사례들과 한수산 장편소설 『군함도』,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임을 밝힙니다. 또한 배경 자료로 영화 『군함도』의 클립을 활용하였습니다.
섬으로 향했다. 잔잔한 파도를 타고 배가 흘러갔다.
“일본으로 가면 매일 따뜻한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군.”
일본인과 친하게 지내는 마을 양장점 박씨의 말이었다. 그래 어디를 가나 일본인 이 시대에 반도에 있으나 섬으로 가나 마찬가지 아닌가! 배 위의 이십 여 명의 우리는 이 항해가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모두가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이미 많은 조선인들이 그 곳에서 돈을 벌고 있다며 한 청년이 말했다. 그는 자기의 지인이 반 년 전부터 이 섬에서 일하고 있고 이미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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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로 자원한 조선인이 있는가
소설은 주인공 이광수가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양장점 박씨의 말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서 일본 기업의 직원들이 직접 조선에 와서 노동자 모집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탄광업계에서는 조선에 사무실까지 두고 더욱 적극적인 모집을 하였다. 일본 기업은 1939년부터 복지시설, 아파트 등을 직은 기업 홍보 책자와 화려한 포스터를 보여주며 조선인을 유혹했다.
유생 정관해(1912~1947)의 『관란재일기』에 따르면, 1941년 1월 홋카이도 탄광 광부 모집 기사가 나자 지원자들이 몰렸다고 한다*. 임금이 높아 2년 정도만 탄광에서 일하면 큰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즉, 자신의 의지로 하시마로 향한 조선인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징용을 가면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과 함께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자원자는 필요인원보다 훨씬 모자란 수였고, 일본기업은 조선총독부와 협조하여 강제성을 띈 노동자 모집을 하였다. 실례로 홋카이도에 있는 스미토모주식회사의 노무계원인 다케오카 다쓰오는 8월 6일 경상북도에서 조선인 노동자 모집허가증을 발급받고 관내 경찰의 협조로 같은 달 17일에 조선인 노동자 100명을 모두 모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 김민철, 김승은 외 2명,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민족문제연구소, 2017 p 35~44
군함도에는 얼마나 많은 수의 노동자가 강제동원 되었는가
강제노역자 수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다카시마 탄갱의 하시마 탄광에 존재했던 조선인 노동자는 1917년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7년 말경에 150명, 1918년 5월 말에 334명의 조선인이 군함도에 있었다. 이는 군함도의 전체 노동자 3,336명의 10%에 달했다. 그 후, 군함도의 조선인 노동자는 큰 폭을 그리며 증가한다. 특히 일본의 강제동원이 시작된 후, 1941년에는 전체 노동자의 14.3%, 1944년 4월에는 29.7%, 같은 해 10월에 32.2%였다*.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43년에 500~800명의 조선인이 군함도에 존재했다. 조선인 중에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여성과 막 젖을 뗀 어린아이도 있었다*. 아래 자료는 하시마 인근 다카시마 탄광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비율을 나타낸 시각화 자료이다.
(*) 황선익,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동북아 역사갈등, 일본공간, Vol.19, 2016, p 209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담당자는 우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お前らはただついてくるだけでいい。国のために石炭を掘るのだ。(너희들은 가만히 따라오면 된다. 나라를 위해서 석탄을 캐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는 소리인 것 같지만 알 수 없었다.
“조선말로 하쇼!”
박씨가 소리쳤다. 고함들이 배를 휘감았다. 우리는 그저 외침이 움직이는 곳으로 향할 뿐이었다.
담당자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내가 자네가 일본을 간다하니, 이걸 구했네. 일본에 도착하면, 높은 사람에게 문서를 보여주면 돈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하는군”
박씨의 말마따나, 이곳에서 일하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나보다. 함께 있던 조선인 모두가 이 문서를 앞으로 내밀었다. 양복 입은 사람이 문서를 처리하며 우리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貴様は今から私たち三菱会社の家族である(너희들은 이제 우리 미쓰비시의 가족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아니 햇빛이 기억이 나질 않아 더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박씨가 나에게 월급을 받는 날이라 했으니 한 달이 맞는 듯하다. 우리가 일본놈들한테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데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 그들은 84엔을 준다고 약속했는데 동전 몇 개와 월급명세서만이 봉투에 있었다. 월급명세서를 보니 건강보험 1엔 50전, 장비 대여료 2엔, 퇴직적립금 3엔 85전, 국채회비 34엔 그리고 국민저금 42엔을 빼니 65전만 남았다고 한다. 오살할 놈들. 일단 배가 고프니 매점에서 무엇이라도 사먹어야겠다.
FACTCHECK
군함도의 조선인의 임금은 어느정도 였는가
조선인은 돈을 벌기 위해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군함도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이 약속했던 임금은 받을 수 없었다. 강제동원된 윤병렬 씨의 급여명세서*는 크게 임금과 공제금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공제금 항목은 강제저금, 가족송금, 후생연금, 보험금, 퇴직수당, 조위금, 장비대여비 등 다양했다. 당시 탄광내부노동자들의 임금은 평균 85엔이었는데, 이는 교사나 면서기 등 당시 전문직의 임금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공제금은 가족송금액 45엔, 강제저금액 35엔으로 임금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월급? 인자 월급 문제가 나왔으니까 또 얘기를 해야 되는데. 그때 월급은 다 같은 게 아니야. 약간의 청년들 23살 적이니까, 사회 나와서 기술 배운 애들도 있었고, 별별 애들이 다 있었지. 기술 방면으로 들 어간 사람들은 월급이 한 달에 한 50~60원씩 탔어요. 그때도. 그러고 보통 월급이 내가 38원이가 40원인가? 그렇게 탔다구. 근데 첨에 들어가서는 한 달인가, 두 달인 가를 그 월급을 줬는데, 나중부터는 반을 주고서 ‘50%는 주고 50%는 너희 고향의 부모처자를 위해서 보내줄 테니까, 50%만 너희가 쓰고 50%는 여기다 저장해 두고서, 우리가 보내준다고.’ 이렇게 얘기하였던 거라."
-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조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 생존자 김민경의 진술****
일본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박탈했다. 일본은 불필요한 소비를 억제해 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 돈을 모으라는 그럴듯한 설득을 했다. 그러나 공제금에는 모자라는 전쟁 비용을 충당과 조선인의 군함도 탈출을 막기 위한 저의가 있었다.「朝鮮人內地移入斡旋要項」‘第三,隊の編成及び指導’』에서는 “임금은 생활비에 필요한 액수 이외는 저축시킬 것(賃金は生活費に必要なる額以外は 貯蓄すべきこと)라고 명확히 쓰여져 있다*****. 이는 미쯔비시라는 단독 회사의 만행이 아닌 당시 제국주의 일본 정부가 주도한 조선인 대상 사기행각이었다.
또한 임금과 공제금에서 발생한 미수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상의(2014)에 따르면, 미수금은 이는 도망자 등 중도퇴직자에게는 전혀 지급되지 않았으며, 강제동원된 전체 인원 의 7.8%에 불과한 만기퇴직자의 경우에도 여비와 약간의 수당만 받았다고 한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 윤병렬 씨의 급여명세서(사진)
(**) 경향신문, [신년기획] 해방당시 10000원, 지금의 10억. 2005
(***) 허광무 (2014). 일제말기 강제동원 조선인 노무자의 미불금 피해 실태. 동북아역 사논총, (45), 67-69.
(****)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서정만의 진술 중 일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위원회, 2009, 『아홉머리 넘어 북해도로』, 145쪽.
(*****)「未拂金供託の問題点ー日鐵强制連行事件 よりー」, 『月刊 社會民主』 566; 古庄正, 2006, 83~85쪽
(******) 이상의 (2014). 해방 후 일본에서의 조선인 미수금 공탁 과정과 그 특징. 동북아 역사논총, (45), 15-17.
매점은 신기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허겁지겁 무언가를 사먹는 노동자들과 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관리자가 있다. 여기와서 나와 꽤나 친해진 오씨는 관리자하고 눈을 마주치지 마라고 나한테 경고한다.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물건을 골랐다. '짝'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매점을 뒤엎는다.
“아니 왜 때리고 난리야!”
“对不起!, 原谅我!(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君たちお互い話をしないように,貴様は私に従ってくるように!(너희들 서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네놈은 따라와!)”
세 언어가 부딪힌다. 관리자는 중국인의 머리채를 잡고 씩씩거리며 매점을 나간다.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오씨가 상황을 엿들어 우리에게 알려줬다. 청주를 다려던 중국인들이 2전이 부족해서 광주에서 온 김씨에게 2전을 빌리려고 말을 걸었다. 이를 본 관리자가 중국인을 가차없이 폭행하였다고 한다.
“자네들도 조심해 이상하게 중국 사람들이랑 말하려고만 하면 저렇게 무자비하게 때리더군.” 오씨가 말했다.
“저 사람은 어디로 끌려가는 거요?”
“나도 모르지만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것 같군.”
오씨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우리는 방안으로 돌아왔다. 청주를 사길 잘한 것 같다. 모두가 한 잔 채 못 마시는 양이지만 조금이나마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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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내 조선인을 위한 시설이 존재하였는가
2015년 일본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군함도는 고층 아파트, 오락시설(66호동), 극장(50호동), 병원(69호동), 무도회장(71호동) 등 완벽한 근대도시의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군함도에 있는 편의시설을 사용하는데 제한적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제금을 제외하고 월 3원의 임금을 받는 조선인들이 해당 시설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군함도의 시설 중 66호와 광원아파트(16호,17호,18호,19호)의 1층과 지하는 당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수용소였다.*하지만, 현재 일본은 군함도의 시설을 소개할 때 이 부분을 오락시설, 음식점이 설치되어있었다고 설명하고 넘어간다. 이번 미래뉴스실습2팀이 군함도에 갔을 때에도 현지 가이드는 “독신자 숙소 밑에 오락시설이 있었다.”만 언급했을 뿐이었다.
다카시마 탄광의 경우는 1944년 3월 1일 조선인 13명이 파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극심한 노동환경과 굶주림으로 인한 저항이었다. 군함도의 일본인 관리자들은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일본의 차별과 폭행에 대한 반격과 저항의 가능성을 늘 경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노기 카오리에 따르면, 미쓰비시가 더욱 두려워한 일은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대였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전쟁 중 포로로 끌려온 이들이거나 납치당한 농민들인데, 중국인 노동자들이 회사의 처분에 분개하여 단식 투쟁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한 미쓰비시는 아예 중국인과 조선인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했다*. 노동 현장에서도 철저히 중국인과 조선인 노동자를 분리했고, 숙소도 혼용하지 않게 했다. 갱 밖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키면 바로 총을 든 일본인이 달려와 노동자들을 사정없이 구타했다고 한다.
(*) 김민철, 김승은 외 2명,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민족문제연구소, 2017 59~60쪽
얼굴과 옷자락은 석탄가루와 흙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모두가 서로의 몰골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봤다. 몸을 씻고 싶다. 땀으로 뒤범벅된 몸뚱아리의 악취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면! 다행히 목욕탕이 열리는 날이다. 혹시나 물이 끊길까 우리는 허겁지겁 목욕탕으로 향했다. 목욕탕은 짠내가 가득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는 이는 없었다. 이제는 이 곳의 생활에 모두가 무뎌지고 있었다. ‘섬이라 물이 부족하다’, ‘바닷물이 몸에 난 생채기를 소독해준다’ 몸을 씻는 사람들이 관리자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한 숨을 쉬었다. 몸을 씻어도 씻은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몸에 묻은 흙과 석탄가루를 털어낸 것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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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환경
미쯔비시의 관리자 이시까와가 말했다. “이 곳은 탄광이다. 탄가루는 작기 때문에 여러분의 사타구니 털 속까지 낀다. 그렇다고 짠 바닷물로 몸을 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회사는 여러분을 위해 소금기없는 대형 해수 목욕탕을 제공한다”
- 한수산의 단편소설 『군함도』
한수산의 단편소설 『군함도』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이 마주한 군함도의 현실과는 상반된 장면이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은 터무니없이 비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군함도 끝나지않는 전쟁』에 따르면, 군함도는 섬의 특성 상, 물을 공급받기 위해 육지로 급수선을 보내야했다. 그러나, 바다가 거칠어지면 급수선이 결항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때마다 미쯔비시가 자랑한 목욕탕의 물은 바닷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문제는 물 뿐만이 아니었다.
"군함도의 조선인 생활환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군함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군대 식 생활을 강요받았다. 히라다부대 제 2중대 2소대 소속으로 천황을 향해 경례를 하고 전사자를 위해 묵념을 했다. [...]
수용소는 바람이 통하지도 않고 바닷물이 스며들어 악취와 습기가 가득했다. 밤에 눈을 붙이려해도 온 몸에 땀이나고 벼룩과 빈대가 몸을 물어 뜯어 자고싶어도 잘 수 없었다."
- 강제징용 생존자 최장섭 자서전*
식당에서 주는 밥은 주먹 크기의 감자와 베트남쌀을 섞은 밥 혹은 콩깻묵에 현미를 섞은 밥에 정어리 부스러기 조림, 된장국 따위였다. 조선인 노동자는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배고파서 아침에 함께 보급되는 점심식사까지 다 먹어버렸다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인 콩깻묵 찐 것을 밥 대신 먹었다. 또 어김없이 설사가 계속됐다. 게다가 노무 관리자가 노동자의 식량을 빼앗아 가뜩이나 없는 식사가 더 없게 되었다”
- 군함도 생존자 구연철씨 인터뷰**
이러한 비참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에게 유일한 희망은 가족을 향해 쓰는 편지였다. 그러나 군함도 내에 우체국이 있었음에도 편지에 담긴 응어리는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편지가 관리자들에 의해 검열 되었기 때문이다. 강제동원된 윤춘기 씨에 증언에 의하면, 편지에 하소연을 적은 이완옥 씨는 편지 내용이 검열에 걸려 경찰과 숙소 관리자에게 불려가 3~4일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 김민철, 김승은 외 2명,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민족문제연구소, 2017 67~75쪽
(**) 군함도-미쯔비시 쿤칸지마 - 군함도 증언 및 간담회, 사진작가 이재갑 초대전”, 구연철, 일제강제동원역사관, 2017.10.14.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와 친하게 지냈던 전씨가 있었다. 경성에서 가족을 위해 동네 친구인 장씨와 이 섬으로 자원한 청년이었다. 전씨는 엄청 똑똑하고 다른 사람들과 유대가 깊었다. 이 주 전 쯤, 장씨가 하염없이 기침을 했다. 일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때도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장씨를 걱정했으나 장씨는 기침 끝에 괜찮다는 말을 되뇌일 뿐이었다. 장씨가 하루라도 쉴 수 있도록 전씨는 내일 장씨와 근무를 바꿔줄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근무가 비어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갱에 들어가길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여기는 지옥이다. 한 줄기 빛에 의지해야하는 암흑 속에서 우리는 찌는 듯한 더위를 이겨야 했다. 이곳이 아니면 어디를 지옥이라 부르랴. 그러나 관리자들은 결근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요즘들어 근무시간이 더 늘어났다. 관리자는 인력 부족이라는 핑계를 들어 하루의 절반을 근무 시간으로 정했다.
FACTCHECK
군함도의 노동환경은 어떠하였는가
해저 탄광인 하시마의 노동 환경은 다른 탄광과 비교해도 ‘최악’이었다고 알려진다. 이는 크게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 바다 밑에 탄광에 있어 채탄할 때마다 염분 강한 갱내수가 쏟아져 갱부들은 각종 피부질환을 겪어야 했다.
둘째, 미끄럽고 경사진 탄갱로에서 잦은 사고가 발생했다.
셋째, 석탄이 미분화 되어 자연발화와 가스 분출의 위험도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헬멧과 고무줄, 속옷, 주먹밥 뿐이었다. 고무줄은 가파른 경사에 떨어지지 않게 서로를 묶는 용도로 쓰였다**.
이러한 위험한 채탄환경으로 인해 일본인 노동자는 갈수록 하시마 탄광을 꺼려했고, 대신 조선인들이 동원되어 탄갱 깊숙한 곳까지 투입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속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전쟁이 본격화되고 미국과의 전쟁이 장기화 되자 군수공장을 돌릴 석탄이 부족해져 12시간 이상을 노역하게 되는데 심할 때는 16시간 이상씩 투입되기도 했다. 12세~15세 정도의 어린이들조차 개미굴이란 갱내 깊은 곳에 들어가 그곳에서 16시간 이상씩 작업하게 했다***.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과 중국인의 기록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지음 ; 박수경, 전은옥 [공] 옮김, 2017, 서울: 선인.
(*) 연구논문 5-일본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동북아 역사갈등”, 황선익, 일본공간, pg 196~226, 2016.6.13.
(**)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端島)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 책임조사 ․ 보고서 작성 : 윤지현(조사2과)
(***)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2.5.29.
우리 셋은 같은 구획에서 일을 했다. 그 날 따라 장씨의 기침 주기가 빨라졌음을 느꼈다. 장씨는 물을 계속 마셨다. 일을 시작한지 한 시간 채 되지 않았는데 장씨의 물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전씨와 나는 장씨에게 물을 나눠 주고 계속해서 괜찮냐고 물었다. 장씨는 계속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장씨의 기침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관리자를 불렀다. 관리자는 심드렁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전씨는 손, 발을 써가며 장씨가 계속 기침을 하니, 의사에게 보내주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なぜ私に迷惑を掛けているの?(왜 나를 귀찮게 하는 거야?) 遊ばずに仕事をしろと言う(놀지말고 일하란 말이야!)”
일본인 관리자는 전씨를 힘껏 걷어찼다. 전씨는 관리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고불고 계속 말을 했으나 관리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FACTCHECK
취약한 환경에 병들고 인권유린까지 당했던 군함도의 조선인들
군함도에서의 질병은 치명적이었으며 장씨와 같이 호흡기 질환을 앓은 강제 징용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장인허증 및 재해보고서 (火葬認許証及び変災報告書-長崎)」 기록에 의하면 사망자 122명 중 60명이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 중 폐렴과 천식 등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은 10명이나 되어 탄광에서의 생활은 호흡기에 치명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질병에 가장 취약한 10세 미만 아이들의 사망은 30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대부분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함도 내에는 병원이 있었으나 조선인들에게는 식사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질병이 있어도 병원에서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둥이를 맞으며 고통스러워 하던 강제 징용자들의 비명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 강제 징용 생존자 구연철 인터뷰**
수많은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은 위험한 일을 모두 도맡아 하면서도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아프다는 이유로 일을 쉬려고 하거나, 작업량이 부족하거나, 중국인들과 대화를 하려하거나 탈출을 하려하거나 모두 구타의 이유가 되었다. 강제 징용자들은 일본인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일해야 했다. 탄광에서의 사망은 대부분 질식 혹은 압사가 원인인 것을 고려했을 때 외상으로 인해 사망한 24人 중 일부는 구타가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43년 어느 날 겨우 15살 된 동포 소년이 노무계에 몸이 아프니 하루만 쉬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분에 넘치는 소리’라며 그 자리에서 거부당한 소년은 울면서 갱으로 들어갔다가 낙반사고로 허리뼈가 부러져 머리를 양다리 사이에 파묻은 끔찍한 상태로 숨졌다.”
장씨가 죽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 둘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장씨와 작별할 시간도 장씨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장씨의 시체를 돌돌 싸매어 자신들이 장례를 치루겠다는 말 뿐이었다. 전씨의 눈에는 인간의 것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날 밤 전씨는 조용히 나에게 속삭였다.
“형씨 나와 함께 이곳을 나가는게 어떻소?” “그게 가능할 리가 있겠나? 여기는 섬이라고.”
“다 방법이 있소 어차피 이 곳에 있으면 내 친구처럼 개죽음이나 당할 텐데. 도망치다 죽나 여기서 죽나 뭐가 다르단 말이오?”
“밖은 전쟁 중이네, 도망친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겠소?”
“어제 관리자들이 하는 말을 들었소. 어제 일본놈들이 미국에게 완전히 박살이 났다고 하더군. 내 생각엔 전쟁의 끝이 얼마남지 않은 것 같단 말이오!”
이 때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한 걸까? 관리자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분노에 들끓은 전씨가 홧김에 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자고 일어나니 전씨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관리자가 배치한 새로운 노동자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FACTCHECK
군함도의 조선인에게는 장례식도 사치였으며 탈출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약속한대로 장례를 치뤘을까?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군함도에서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따위는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못쓰는 가마니짝 따위로 대충 덮어 거룻배에 싣고 가 나카시마 섬에서 기름을 부어 대충 태웠다. 사람 태우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전쟁 전만 해도 나카시마 화장장에서 연기가 안나는 날이 있었지만, 전쟁 말기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온종일 검은 연기가 피어 올라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망가는 사람은 있었을까?
있긴 있었다. 하지만 도망가는 사람이 간혹 있었지만 감시도 심하고 섬이어서 거의 붙잡혀왔으며 고문을 심하게 당하였다고 한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은 배설물을 운반하는 배나 물자를 운반하는 배에 몰래 올라탔다. 토나무로 뗏목을 만들거나 그냥 헤엄을 쳐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육지까지는 약 5킬로미터 살인적인 조류를 견뎌야 했다. 헤엄을 잘 치는 이들도 도중에 힘이 빠져 익사하거나 추격해온 회사 사람들에게 붙잡히기 일쑤였다. 일본인 가운데는 탈출한 조선인을 살려 숨겨준 사람도 있었고, 나가사키 반도에 떠내려 온 주검을 묻어주고 묘비를 세운 이들도 있었다**.
“잔목을 이용해 뗏목을 만들어 헤엄쳐 나왔지만 육지에서 일본감시단에게 잡혔고 고무로 만든 딱딱한 줄에 살이 묻어나게 맞으며 갖은 고문을 당했다.”
– 강제징용 생존자 최장섭 씨 증언***>
(*)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박O익의 피해조사서철)
(**) 김민철, 김승은 외 2명,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민족문제연구소, 2017
(***)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 하시마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과 중국인의 기록.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지음 ; 박수경, 전은옥 [공] 옮김, 2017, 서울: 선인.
새로운 노동자들은 상당히 말이 없다. 얼굴에 허망함이 가득해보인다. 요즘 나도 근무 시간이 늘어서 피곤했는데 다행이다. 오늘따라 작업장이 상당히 덥다. 땀이 많이나고 습기가 가득한 느낌을 받는다. 눈이 계속해서 감긴다. 어제 전씨와의 대화가 그렇게 길었었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이상하게 오늘은 관리자가 드문드문 보인다. 나는 좀 천천히 일하자고 말했지만, 이 두 사람은 처음이라 그런지 힘이 넘치나 보다.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려고 뒤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똑’ ‘똑’ ‘똑’
이마에 물이 떨어진다. 작업장 여기저기에서 물이 떨어진다. 힘들어서 목이 말랐는데 잘됐다. 혓바닥을 천장에 갖다댔다. 짠내음이 입안에 골고루 퍼진다. 다시 힘을 내서 일을 해야겠다. 언제 관리자가 올지 모르니 길게 쉴 수는 없다. 곡괭이를 들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큰 돌을 뽑았다. 돌 사이로 물이 흘러내린다. 작업장 내에 굉음이 쏟아진다.
“이게 무슨 소리요?”
뒤를 돌았다. 왜 아무도 없지?
“왜 아무도 없는게요?”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허리까지 검은 물이 차올랐다.
FACTCHECK
군함도에서의 조선인 사망자들
소설과 같이 실제로 군함도를 탈출하거나 탄갱에서 출수사고가 나서 익사한 한인 노동자는 4명이나 있었다*. 대체로 사망 원인을 살펴보면, 사망자 중 절반정도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 중 폐렴과 천식 등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이 10명이었다. 또한 ‘타박상’, ‘골절’ 등 ‘외상 사망자’는 24명 이었다. 이들은 외상으로 인해 머리, 내장, 폐 등 신체의 다양한 부분에 손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질식’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25명이며 ‘압사’로 인한 사망자는 9명에 달했다**.
나이대별 사망자로는 20대 사망자가 가장 많은 가운데, 10세 이하 아동의 사망이 30대 사망자 못지않게 많았다. 이는 가정을 이루고 있는 한인 노동자 가족 중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자녀를 잃은 경우인데, 아이들은 영양실조와 면역력 부족 등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아래는 각종 원인들로 인해 사망한 조선인의 수를 시각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