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음향신호기와 훌쩍 떨어진 점자블록

  시각장애인 김 씨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음향신호기의 안내를 받는다.
점자블록을 따라 걷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손을 뻗어 음향신호기를 찾는다.
그러나 신호기가 잡히지 않는다.
허공을 손으로 젓는 그에게 주변 행인들이 대신 신호기를 눌러 준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문의해 들은 사례를 각색한 것입니다.)

국토교통부 ‘도로안전시설 설치 및 관리지침’

  규정에 따르면, 도로에 설치된 점자블록은 음향신호기에 손이 닿을 정도의 위치까지 설치돼야 한다. (좌측 그림 참조)
그러나 음향신호기와 점자블록 사이의 거리가 떨어져있어 김 씨와 같은 시각장애인이 이용에 불편을 겪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두 가지 시설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장애인의 이동권을 침해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주변 도로를 살펴보니...

  12월 13일 오후, 관악구청을 기점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횡단보도 상황을 살펴봤다. 점자블록의 설치 및 관리 책임이 있는 행정기관으로 향하는 이 도로를 시각장애인은 쉽게 걸어갈 수 있을까. 기자가 점자블록을 따라 걸어 살펴본 결과, 총 26개의 음향신호기 중 18개는 점자블록과 멀리 떨어져있었다. 단 8개의 음향신호기만이 점자블록을 따라 이어졌다. 심지어 어떤 신호기는 화단 등으로 넘어질 위험도 있었다.

  그나마 관악구는 양호한 편이었다. 11월 17일 기자가 살펴본 광화문과 시청 일대의 총 41개의 음성신호기 중 34개가 점자블록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청을 비롯해 정부서울청사, 세종문화회관, 서울역사박물관 등 공공시설이 밀집한 이 지역에서 단 7개만이 잘 설치돼 있었다는 것이다.

점자블록과 음성신호기가 훌쩍 떨어져 있다. 점자블록을 따라가던 시각장애인이 쉽게 길을 건널 수 없는 배치다.

점자블록과 음성신호기가 떨어져있을 뿐 아니라, 전신주 앞에 구조물이 설치돼 자칫하면 넘어질 위험도 있다.

음성신호기가 있는 전신주 앞에 설치된 제설함 역시 안전한 이동을 방해한다.

전신주 앞에 설치된 화단이 설치된 경우도 많았다.

“불편해도 뭐, 항상 그랬으니까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편의시설센터에서 근무하는 시각장애인 홍서준씨는 “(국토교통부) 지침대로 설치가 되기만 해도 좋다”면서, “점자블록이 잘못됐다고 자치구에 신고를 하면 블록 위치를 옮겨주긴 옮겨주지만, 시간이 많이 들어서 모두 수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접수되는 민원의 70%는 점자블록의 설치와 관련된 것들이다.홍 씨는 음향신호기와 점자블록이 떨어져있는 경우가 너무 많아, 이제는 점자블록을 따라 걷기보다는, 아예 도로 끝을 따라 걸으면서 전신주 위치를 추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자칫 잘못하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홍씨는 “불편해도 뭐, 항상 그래왔으니 적응을 할 뿐”이라고 답했다.

리모콘 보급률도 낮아

  국토교통부 지침을 위반한 채 점자블록과 횡단보도의 음향신호기가 멀리 떨어져 설치된 우리 거리에, 시각장애인들이 맘 놓고 나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리모콘이다. 흔히 음성유도기라고 불리는 리모콘을 이용하면 점자블록에서 음향신호기까지 헤매지 않고 음성안내를 받을 수 있다. 한 대 당 2만원 정도 하는 편리한 기기이지만, 보급률이 낮고 리모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장애인들도 많다.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의 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하는 이재민씨는 “음향신호기가 빠짐없이 모든 횡단보도에 설치되고, 리모콘 등의 장치를 홍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진정한 자립을 위하여

  시각장애인이 자립생활을 하는 데에 핵심이 되는 것은 단독보행이다. 보조인의 도움 없이도 거리를 거닐면서 스스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배리어프리(barrier-free)한 환경이 필수적이다. 점자블록과 음향신호기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점자블록 설치 실태를 살피며 걷는 동안, 기자는 평창 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을 홍보하는 수호랑 반다비 모형을 자주 만났다. ‘하나된 열정, 하나된 대한민국’을 외치는 귀여운 인형들 앞 횡단보도를 시각장애인은 건널 수 없다. 우리가 하나라고 외칠 것은 패럴림픽에 출전하는 장애인 선수들 뿐 만이 아니지 않을까.